-
목차
한국은 다시 한번 전략적 시험대에 올랐다. 도널드 트럼프의 재선과 함께 미국의 대외정책 기조는 기존보다 더욱 일방적이고 거래 중심적인 방향으로 전환되고 있다. 동맹은 동맹이되, 비용을 분담하지 않으면 보호하지 않겠다는 메시지는 더욱 분명해졌고, 미중 경쟁 구도 속에서 미국은 한국에게 보다 명확한 선택을 요구하고 있다. 반면, 중국은 한국의 경제 생태계 깊숙이 자리 잡은 공급망 파트너이자, 기술·자원 분야의 중요한 플레이어다. 양국 모두에게 등 돌릴 수 없는 한국은 지금 과거처럼 전략적 모호성만으로 생존할 수 없는 시대에 진입했다.
한국 외교의 구조적 전환점
하지만 중요한 변화는, 이제 한국이 미중 사이에서 누구를 선택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공격을 피하느냐는 방어 전략의 정교화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것이다. 트럼프 시대의 미국은 동맹국조차 관세·보조금·통상 압박 대상에서 예외가 아니며, 중국은 반도체, 배터리, 전기차 등의 기술 부문에서 한국을 경쟁자로 보기도 하고, 동시에 협력자로 보기도 한다. 이런 복합적 시선 속에서 한국은 어느 편에 서도 일방적인 보복을 피하기 어려운 구조다.
과거에는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라는 이분법이 가능했지만, 이제는 기술안보, 공급망 연계, 반도체 설계·장비 등 분야별로 안보와 경제의 경계가 붕괴되고 있다. 미국은 자국 기업의 안보 위협이라는 이유로 한국 기업의 중국 내 반도체 투자에까지 제한을 가하고 있으며, 중국은 한국의 글로벌 전략을 견제하기 위해 희토류, 배터리 원자재 공급 제한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다. 이처럼 선택이 아니라 공격을 어떻게 피하고, 피해를 최소화할 것인가가 외교·산업 전략의 핵심 과제가 되었다.
한국 경제의 구조적 취약성과 방어적 재조정의 필요성
한국은 2025년 기준으로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이지만, 공급망 측면에서는 고도의 외부의존형 경제다. 반도체 설계는 미국에, 생산장비는 일본과 네덜란드에, 소재는 중국과 대만에, 최종 수요는 미국과 중국에 분산돼 있다. 단일 부품, 한 국가의 제재만으로도 생산라인 전체가 마비될 수 있는 구조는 트럼프의 2기 보호무역주의 앞에서 큰 리스크로 작용하고 있다.
미국은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을 재해석해 외국 배터리 기업들에 대한 보조금 지급 조건을 더욱 까다롭게 만들고 있고, 트럼프 행정부는 ‘친미 기업’에 대한 세제 인센티브를 강화하면서 사실상 미국 내 생산을 강제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이는 한국 배터리 기업들에게 미국 현지화 부담을 늘리는 한편, 중국과의 협업을 단절하라는 압박으로 작용하고 있다.
한편 중국 역시 반도체·배터리 소재 수출을 제한하는 방식으로 한국을 압박하고 있다. 특히 갈륨·게르마늄·흑연 등 첨단소재의 대중 의존도가 높은 한국 입장에서는, 미국에 협조할수록 중국의 공급망 무기화에 더 크게 노출되는 딜레마에 직면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이 취할 수 있는 전략은 단순히 외교적 줄타기를 넘어서, 산업 구조 자체의 ‘방어적 다변화’, 즉 유럽, 동남아, 인도, 중동과의 공급망 다변화, 핵심 소재의 국산화, 전략적 비축물자 확보 등의 구조적 재조정이 요구된다. 다시 말해, 미중의 의도를 해석하고 조율하는 정치적 선택보다, 물리적으로 공격받지 않을 위치를 만드는 공급망 방어전략이 핵심이다.
안보도, 산업도, 기술도 회피 전략이 필요한 시대
트럼프 2기 정부는 동맹국에게 방위비 분담금 인상을 다시 요구하고 있으며, 그 수위는 사실상 동맹 유지를 위한 거래로 전락하고 있다. 한국은 주한미군의 주둔 지속성과 주한미군 전략자산 활용에 대한 명시적 보장을 받지 못한 채, 높은 분담금과 미국산 무기 구매 압박에 직면하고 있다. 이러한 기조는 미국이 원하는 안보 협력에 불응할 경우, 한국을 무역 보복이나 외교 소외 대상으로 전환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국 역시 기술, 안보, 외교 영역에서 한미일 안보협력 강화 움직임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특히 2025년 들어, 한일 군사협력, 나토-아시아 협력 확대 등이 가시화되자, 중국은 한국의 군사적 중립성과 외교 독립성을 의심하고 있다. 이는 기술 협력 축소, 기업 간 거래 지연, 비공식 보복 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처럼 한미동맹 강화는 중국의 외교·경제적 경계심을 키우고, 한국의 대중 경제에 리스크로 작용하는 이중 효과를 낳고 있다. 전통적인 안보 강화가 산업 리스크로 되돌아오는 시대가 된 것이다.
결국 국제질서는 한국에게 정답 없는 문제를 푸는 시험지를 던져주고 있다. 누구도 한국에게 명확한 보상을 약속하지 않으며, 어느 편에 서더라도 불이익이 존재한다. 이런 복합적 리스크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정면 대응보다 회피, 정치적 선언보다 물리적 회복탄력성 확보, 기술적 자율성과 외교적 다자주의 확대라는 방어적 실리주의 전략이 절실하다.
결론적으로, 트럼프 시대의 한국 외교와 산업 전략은 더 이상 미국이냐 중국이냐의 이분법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선택보다 중요한 것은 방어이고, 줄타기보다 절실한 것은 공격을 피할 수 있는 구조적 자율성 확보다. 한국은 지금, 미중이라는 거대한 파도 속에서 방향타를 돌리는 것이 아니라, 배의 균형을 지키는 기술과 구조를 강화하는 데 집중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