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일본은 오랜 동맹국이지만, 무역 분야에서는 이해관계가 종종 충돌합니다. 특히 트럼프 행정부 시절 미국의 일방적인 관세 부과와 자유무역협정 재조정 압박 속에서 일본은 민감한 농업 시장을 중심으로 큰 딜레마에 직면했습니다. 이 글에서는 트럼프 정부의 통상 압박, 일본의 대응 전략, 그리고 농업 부문에서의 내적 갈등이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일본의 대미 무역협정 협상과 농산물 개방 문제를 살펴보겠습니다.
트럼프 행정부의 미국 우선주의와 일본에 대한 무역 압박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직후인 2017년, 미국을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서 탈퇴시켰습니다. 이 결정은 일본에 커다란 충격을 안겼습니다. 일본은 TPP를 통해 미국과의 무역 자유화를 공고히 하면서 중국의 영향력을 견제하고자 했지만, 트럼프는 TPP를 미국의 일자리를 빼앗는 협정으로 규정하고 탈퇴한 것이죠.
이후 미국은 일본을 상대로 양자 무역협정을 강력히 요구했습니다. 특히 미국은 일본 시장의 농산물 개방을 주요 협상 쟁점으로 삼으며, 쇠고기, 돼지고기, 유제품, 쌀, 밀 등 미국 농민들의 수출 확대를 위한 압박을 지속했습니다. 트럼프 행정부는 무역적자 축소를 명분으로 삼았지만, 실제로는 자국 내 정치적 기반인 농민층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한 포석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은 미국산 자동차에 대한 관세 부과 가능성이라는 무역 보복 카드를 우려하며 협상에 임해야 했습니다. 자동차 산업은 일본 경제의 핵심 중추이자, 미국 수출의 중요한 분야였기 때문에, 일본은 농산물 시장을 일부 개방함으로써 자동차 관세 부과를 피하는 전략적 타협을 선택했습니다.
농산물 개방을 둘러싼 일본 내 정치·경제적 딜레마
농산물 시장 개방은 일본에서 매우 민감한 이슈입니다. 일본은 인구 고령화와 농촌 인구 감소로 인해 농업이 점점 약화되고 있지만, 동시에 농업은 일본 보수 정치 세력의 중요한 지지 기반이기도 합니다. 특히 쌀 산업은 일본의 상징성과 자급률 문제, 식문화와도 깊이 연관돼 있어 정치적으로 성역처럼 여겨져 왔습니다.
트럼프와의 무역협상에서 일본이 가장 난감했던 부분은 바로 이 농업 부문이었습니다. 미국은 일본에게 TPP 수준의 농산물 시장 개방을 요구했고, 이에 따라 일본은 TPP 협정 당시 타국에 약속한 수준 이상으로 미국산 농산물 수입을 허용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일본 정부는 미국산 쇠고기, 돼지고기, 와인 등에 대한 관세를 단계적으로 인하하기로 합의했습니다. 반면, 일본산 자동차에 대한 미국의 관세 부과는 보류 상태로 남았으며, 구체적인 철폐 약속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즉, 일본은 명확한 보상을 받지 못한 채 내수 농업 보호와 외교적 균형 사이에서 복잡한 선택을 해야 했던 셈입니다.
국내적으로는 일본 농민 단체와 일부 정치인들이 정부를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특히 전국농업협동조합중앙회는 농업 기반 붕괴를 우려하며 정부의 협상 타결을 공개적으로 비난했습니다. 하지만 아베 신조 총리 당시 정부는 TPP 수준을 넘지 않는 수준이라는 명분 아래, 이번 협상이 최소한의 방어선을 지킨 결과라고 설명했습니다.
일본의 다자무역 강화 전략과 포스트 트럼프 시대의 시사점
트럼프 시기의 양자협상 일변도 압박은 일본에게 큰 교훈을 남겼습니다. 이에 따라 일본은 미국과의 협상 외에도 다자간 무역협정 강화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게 됩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CPTPP(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의 주도적 추진입니다. 미국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일본은 호주, 캐나다 등과 함께 CPTPP를 정착시키고, EU와도 EPA를 체결하면서 무역 다변화를 도모했습니다.
또한 일본은 중국이 RCEP에 참여하는 와중에도 미국의 복귀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CPTPP의 문을 열어두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이는 특정 국가에 의존하지 않고, 다양한 국가와의 협력을 통해 경제적 리스크를 분산하겠다는 일본의 장기 전략이기도 합니다.
결과적으로 일본의 대미 무역협상은 단순한 양보와 대가의 문제를 넘어서, 세계 무역 질서 속에서 자국의 생존 전략을 어떻게 구상하고 실행하느냐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일본은 트럼프 시절을 계기로 더 이상 미국 중심의 외교에만 기대기보다는, 자율성과 다자주의를 중시하는 새로운 방향성을 설정하게 된 것입니다.
트럼프 행정부 하에서 일본은 민감한 농산물 시장을 둘러싸고 어려운 협상에 직면했지만, 이를 통해 외교 전략을 재정비하고 새로운 무역 질서를 주도하는 국가로 나아가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일본의 사례는 단순한 강대국의 압력에 굴복한 약소국의 모습이 아닌, 실리와 전략 사이에서 치밀한 외교적 줄타기를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습니다.